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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전설도 결국 사람이다 - ASL 결승전이 남긴 여운

안녕하세요, ASL 포커스입니다. 오늘은 진하게 여운 남았던 ASL 시즌 21 결승전 얘기를 다시 해보려고 합니다. 관점을 조금 바꿔서 살펴보려고 해요. 부상과 에이징 커브 관점에서요. 두 선수의 플레이를 보는 내내 감탄도 했지만, 이영호 선수의 패배가 확정되었을 때 묘하게 짠하고 먹먹한 감정이이 들었어요. 아니, 먹먹하다는 표현도 조금 거창한가 싶긴 합니다. 그냥 끝맛이 좀 이상했습니다.

ASL 결승전이 남긴 여운

머리는 아는데 손이 따라주지 않는다

이번 결승전은 잔인한 면이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조차 세월과 부상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생중계로 확인시켜 준 무대였으니까요.

경기 내내 이영호 선수의 판짜기는 다소 일관적이었습니다. 7전 4선승제에서 무려 네 번이나 초반 방어를 포기하고 자원에 올인하는 '노배럭 더블 커맨드'를 박았죠. 왜 그랬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본인만 알겠지만, 손목 상태를 고려하면 장기전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든 초반에 승부를 보거나, 빌드에서 압도적으로 먹고 들어가서 컨트롤의 부담을 줄이려던 처절한 생존 전략이었던 거죠.

그런데 막상 그 전략이 4드론이나 드론 러시 같은 날빌에 부딪혔을 때, 과거라면 기계처럼 막아냈을 디테일한 마이크로 컨트롤이 완벽하게 안 되더군요. 특히 초반에 빠르게 승부를 보려는 8배럭 전략 상황에서 방어의 핵심인 벙커에 마린이 들어가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거나, 7세트에서 상대 유닛의 길을 막는 일꾼 블로킹이 꼬이는 걸 보면서… 솔직히 잠깐 멍해졌습니다. '아.. 저 이영호가 저렇게 허무하게?' 싶었거든요.

직장 생활 10년 차가 넘어가니 이게 남 일 같지가 않습니다. 머릿속으론 이미 업계 트렌드 다 읽고 기가 막힌 프로젝트 판을 짰는데, 막상 야근하면서 실무 디테일을 챙겨야 할 때 체력이 방전돼서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떠올랐거든요.

아,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프로게이머의 세계는 좀 더 냉혹하긴 하네요. 회사는 선배가 실수해도 밑에 팀원들이 어떻게든 커버라도 쳐주지, 1대1 프로게이머의 세계는 온전히 자기가 다 감당해야 하니까요. 그 순간 모니터 앞에서의 고립감이 얼마나 컸을지 저는 감도 안 잡힙니다.

승부사가 전설을 대하는 법

부상으로 전성기 실력을 내지 못하는 전설적인 상대를 마주한 챔피언 박상현 선수의 태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박상현 선수는 이렇게 말했어요. "실력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지만, 전설적인 이영호 선수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에 만나면 제가 질 거라는 예상이 많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와 정말 멋진 인터뷰 아닌가요?

보통 우승을 하면 "이제 내 시대다"라고 외칠 법도 한데, 그는 자신이 완벽히 넘어선 게 아니라는 걸 담담하게 인정했습니다. 상대의 거대한 커리어와 부상 투혼을 리스펙트 하면서도, 경기 내내 압박감 속에서 기어코 4드론 러쉬로 승리를 가져온 대담함을 칭찬해주고 싶어요.

이게 진짜 승부사 아닐까요. 물론 불리한 상황에서 말 그대로 잃을 게 없어 과감히 던진 승부수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극한의 긴장감 속에서 망설임 없이 시도한 그 결단력만큼은, 우리가 현업에서 늘 갈망하는 진짜 프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스타2 전환기에서 스타1 프로의 꿈을 접어야 했던 17세 소년이 먼 길을 돌아 기어코 최강의 자리에 오른 서사까지 겹쳐서, 제 눈엔 유독 더 묵직하고 멋지게 다가왔습니다.

아쉬움 남는 7세트를 뒤로하며

결승전이 끝나고 커뮤니티에서는 7세트 마지막 장면을 두고 말이 참 많았습니다. 왜 본진을 띄워서 앞마당으로 이사하지 않고 허무하게 GG를 쳤냐며 의아해하는 시선들이었죠. 지난번 분석에서도 다루었지만, 이 부분은 지금도 짙은 아쉬움이 남긴 합니다.

추측컨대, 완벽했던 자신의 판짜기가 예상치 못한 추가 저글링 난입에 어그러졌을 때, 그 찰나의 혼란을 수습해야 할 손목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 순간 이영호 선수 '아.. 여기까지 구나'라고 느끼면서 gg를 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진짜 이유는 이영호 선수 본인만 알겠지만,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팬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아프고 씁쓸한 서사는 없을 겁니다.

"선수들이 나이가 듦에도 모두가 진심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노력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상현 선수의 이 마지막 말이 맴돕니다. 세월에 깎여나가며 예전 같은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더라도, 부서지는 몸을 이끌고 어떻게든 새로운 빌드를 깎아오는 그 진심들.

사실 우리가 아직까지 스타를 놓지 못하는 건, 퇴근 후 치맥을 뜯으며 즐기는 보기 편한 익숙함 속에 한계를 극복하려는 그들의 뜨거운 인간미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 아닐까요.

내일 출근할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헛헛해지는데, 남은 맥주나 마저 비우고 자야겠습니다. 다들 편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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